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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중소기업을 운영하거나 작은 가게를 꾸려가는 소상공인들에게 '은행 문턱'은 거대한 통곡의 벽과 같습니다. 대출을 받기 위해 산더미 같은 서류를 들고 창구 앞에 서면, 마치 죄인이 된 것처럼 작아지고 '슈퍼 을(乙)'의 비참함을 느끼곤 합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금융 역사가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닙니다. 시대에 따라 은행은 자금을 공급하는 따뜻한 핏줄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권력을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갑이 되기도 했습니다. 20년간 은행의 최전선에서 대출을 담당하며 은행의 흥망성쇠를 온몸으로 겪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과거의 은밀한 금융 문화부터 현재의 심각한 시스템적 부작용까지 가감 없이 폭로해 보겠습니다.
이건 온전히 제 개인적인 의견이며 전체를 매도하는 것은 아님을 밝힙니다.
1. 대출계장이 왕이던 시절: 봉투 문화와 예대마진의 꿀콤보
젊은 세대들은 '대출계장'나 '당좌계장'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할 것입니다. 하지만 200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은행은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이자 완전한 '갑'이었습니다. 그 당시 은행의 주 수익원은 고객들의 예금을 싼 이자로 유치해, 그 돈으로 기업들에게 비싼 이자를 받고 빌려주는 '예대마진'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시절에는 은행원들이 대출을 해주려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금을 더 많이 유치하기 위해 영업을 뛰었고, 대출을 받으려는 기업인들은 은행 문 앞에 줄을 서야 했습니다.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음성적인 '봉투 문화'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대출 한도를 조금이라도 더 늘리기 위해, 혹은 부도 막기에 필수적인 약속어음이나 당좌수표책을 한 장이라도 더 교부받기 위해 담당자에게 봉투를 건네는 일이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제가 입행하고 6년 차 대리 시절, 한 모텔 대표님의 대출 연장 업무를 처리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감사하다며 책 한 권을 선물로 주고 가셨는데, 나중에 책장을 넘겨보니 그 속에 두툼한 돈봉투가 들어있더군요. 깜짝 놀라 팀장님께 보고했더니 고개를 끄덕이시며 '당장 그 고객 계좌로 전액 입금 처리해 드려라'고 지시하셨습니다. "
이후 금융권이 투명해지면서 제가 대리가 되었을 즈음에는 이러한 노골적인 봉투 문화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하지만 은행이 쥐고 있던 권력의 크기는 여전히 막강했습니다.
2. 지주사 전환과 무한 경쟁: 2주 걸리던 대출이 3일 만에 터지던 시대
시간이 흘러 각 은행들이 덩치를 키우기 위해 금융지주사 체제로 전환하던 시기가 도래했습니다. 이때는 과거의 보수적인 태도와는 정반대로, 은행들이 시장 점유율을 늘리기 위해 미친 듯이 공격적인 대출 영업을 감행했습니다. 어제의 갑이었던 은행들이 갑자기 고객을 모시기 위해 머리를 숙이던, 그야말로 '금융의 대항해 시대'였습니다.
총력전당시에는 은행 간의 자존심 싸움이 치열하여, 분기마다 '이번 달에는 A은행이 돈을 잘 풀어준다', '다음 달에는 B은행 정책이 완화된다'는 소문이 시장에 돌았습니다. 보통 서류 검토와 승인까지 최소 2주 이상 걸리던 복잡한 기업대출이, 경쟁이 붙자 단 3일 만에 통장에 대출금 기표가 완료되는 놀라운 광경이 매일같이 벌어졌습니다. 리스크 관리는 잠시 뒤로 미뤄둔 채,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기 위해 폭주하던 금융권의 황금기이자 위험한 순간이었습니다.
3. 규제의 그물망과 '보증서 앵벌이'로 전락한 중소기업
현재의 금융 시장은 과거의 활력을 완전히 잃어버렸습니다. 가계대출은 정부의 가계부채 총량 규제, DSR, DTI라는 삼중 족쇄에 묶여 숨도 쉬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기업대출은 자유로울까요? 전혀 아닙니다.
은행들은 리스크를 짊어지려 하지 않고, 오직 재무제표가 완벽한 대기업이나 초우량 기업들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결과, 조금이라도 재무제표가 흔들리거나 대표자의 신용점수가 아쉬운 일반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은 은행 창구에서 철저히 외면받습니다. 은행원들은 문을 두드리는 소상공인들에게 "우리 자체 신용으로는 대출이 안 되니 신용보증기금, 기술보증기금, 혹은 지역신용보증재단에 가서 보증서 끊어오세요"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합니다.
하지만 담보도 없고 매출도 꺾인 소상공인들이 보증기관의 엄격한 심사를 뚫고 보증서를 발급받기란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시간은 수 주일씩 소요되고 심사 문턱은 통곡의 벽입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인터넷에는 "정부 정책자금 100% 승인"이라는 달콤한 허위·과장 광고가 판을 치고, 대출 금액의 일정 비율을 수수료로 뜯어가는 불법 브로커 업체들이 중소기업의 피를 빨아먹으며 우후죽순 생겨나는 비극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4. 정관의 발기인도 모르는 은행원: 본부 집중화가 낳은 전문성 하락
더 심각한 문제는 은행 내부 시스템의 붕괴에 있습니다. 과거에는 영업점의 베테랑 직원이 여신 심사부터 서류 관리, 사후 부실 추심까지 모든 과정을 책임졌기에 금융 지식의 깊이가 엄청났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은행들은 효율성을 명목으로 심사, 여신 서류 검토, 사후관리 기능을 모두 '본부(센터)'로 집중시켜 버렸습니다.
이로 인해 최전선 영업점 직원들은 단순 '서류 접수원'으로 전락했고, 업무 지식 수준은 처참할 정도로 떨어졌습니다.
규정에 없는 무리한 서류를 고객에게 징구하느라 시간을 끌고, 간신히 승인을 받아 자서(자필서명)를 받아놓고도 서류가 누락되었다며 고객을 두 번 세 번 다시 부르는 주객전도의 상황이 매일 일어납니다. 오전에 입금해 주기로 약속한 대출금이 본부 심사에 밀려 오후 늦게야 입금되어 기업의 자금 결제를 꼬이게 만드는 일은 예사입니다.
최근 제가 직접 목격한 황당한 사례가 이를 방증합니다. 어느 법인이 100% 보증서 담보대출을 신청했습니다. 법인이 대출을 받으려면 정관 규정에 따라 이사회나 주주총회 결의를 거쳐야 하므로 정관 제출은 필수입니다. 해당 법인은 최초 설립 당시 발기인이 A와 B였으나, 이후 C가 그 주식을 전량 양수한 상태였습니다. 당연히 역사를 기록한 정관 원본에는 최초 발기인인 A와 B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서류를 접수한 은행원은 정관을 보더니 주주명부와 다르다며, "정관에 적힌 발기인 이름을 지금 주주인 C로 바꿔서 다시 공증받아 오라"는 법학 기초도 모르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했습니다.
정관을 왜 검토해야 하는지, 발기인의 개념이 무엇인지조차 모른 채 기계적으로 일하는 직원들이 창구를 지키고 있는 것이 냉혹한 현실입니다.
5. 큰 회사만 살리는 세상: 은행이 다시 갑이 된 사회의 위험한 미래
결국 가계대출은 규제로 막히고, 기업대출은 우량 기업에만 쏠리면서 일반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은 은행 문턱을 넘을 때마다 '슈퍼 을'을 넘어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대한민국의 경제 체질이 IMF 외환위기 이전보다 훨씬 건강해졌다고 자평합니다. 하지만 은행이 완벽한 '갑'의 지위를 되찾고 돈줄을 거머쥔 채 몸을 사리는 지금의 구조는 심각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은행이 안전한 대기업과 우량 기업에게만 자금을 몰아주면, 단기적으로는 부실률이 낮아 보여 은행 장부는 깨끗해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대한민국 경제의 모도리인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생태계를 고사시키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대기업만 살아남는 기형적인 경제 구조에서, 만약 향후 글로벌 경제 위기나 예기치 못한 대외 악재로 인해 그 거대한 대기업 하나가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요? 연쇄적으로 엮여있는 금융권 전체가 통째로 흔들리게 되고, 결국 과거 역사처럼 또다시 국민들이 피땀 흘려 모은 혈세를 쏟아부어 은행을 살려내야 하는 대재앙이 반복될 수 있습니다. 비올 때 우산을 뺏는 보수적인 은행 권력의 폭주는 결국 국가 경제 전체를 시한폭탄으로 만드는 일임을 금융당국과 은행권은 뼈저리게 반성해야 할 때입니다.
자주묻는 질문
은행에서 말하는 정관 결의서의 진짜 확인 목적은 무엇인가요?
법인이 대출(채무 부담 행위)을 일으킬 때 정당한 내부 절차(이사회 또는 주주총회 결의)를 거쳤는지 확인하여 법적 분쟁을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브로커를 통한 정책자금 대출 수수료 지급은 합법인가요?
제3자가 정책자금 대출을 대가로 수수료를 요구하거나 수령하는 행위는 100% 불법이며, 적발 시 대출 취소 및 형사 처벌 대상이 됩니다.
영업점 직원의 대출 실수로 잔금이 늦어지면 보상받나요?
은행의 명백한 과실로 손해가 발생했다면 입증을 통해 민원 및 배상 청구가 가능하나, 실무적으로 인과관계 입증이 까다로워 사전 체크가 필수입니다. 그리고 실무적으로 이 은행과 거래를 계속 하려면 민원제기는 쉽지가 않겠죠. 이래서 을이 될수밖에 없을거 같네요.
* 다시한번 이글은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모든 은행원들을 폄하하는 것은 아님을 밝힙니다.
필자 CAROS